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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어졌던 당일 사람들은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오랜 기간 로 판결로 인해 법적으로 죽음의 일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생명을 위한 승리를 애도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슬픔, 분노, 과장된 행동을 유발시켰다. 캐나다의 작가 마가렛 앳우드는 "저는 제가 "하녀 이야기"라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법원이 그 내용을 현실로 만들고 있어요."라고 썼다(https://www.theatlantic.com/.../supreme-court-roe.../629833/).
반면, 생명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를 축하했다. 호세 고메스 미국 가톨릭 주교회 의장은 "거의 50년 동안 미국은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는지 죽을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불의한 법을 시행해 왔다. 우리는 오늘 법원이 이 결정을 뒤집은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https://www.americamagazine.org/.../roe-overturned...).
정말 놀라운 반응은 세 번째 그룹에서 나왔다. 엄밀히 따지면 생명을 옹호하지만 이 그룹은 로 판결의 전복을 일종의 문제, 주의해야 하거나 심지어 슬퍼해야 할 이유로 보았다. 이들 중 일부는 심지어 우리가 축하하는 것을 비난하기도 했다.
변증론자인 마이크 윙거는 이러한 그룹의 사람을 "곁눈질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https://www.facebook.com/100050542026739/posts/pfbid02U91o7mCGWuJWqknpE6nQaxSAaRSJiZJ2iDaZ8n88rBDxnHak8TqLMqLtZ6yWoTLCl/?d=n).
"… 당면한 문제에서 갑자기 벗어나 자신들이 더 신경을 쓰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성가시게 느껴진다는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곁눈질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그의 말이 맞다. 50년 가까이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연합시킨 목표를 달성한 뒤 교회 일각에서 나오는 두려워하거나 우려하는 어조를 보는 것은 낯설었다.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가 돕스 판결이 낙태를 끝냈다거나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 잘못 이해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타당하다. 로 판결이 전복된 것은 이 둘 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말했듯이, 이것은 태아의 생명을 위한 이 싸움의 끝이 아니다. 아직 그 싸움의 종말이 시작된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그 싸움의 "시작의 끝무렵"일 뿐이다. 생명을 옹호하는 운동은 계속되어야 하며, 앞으로는 아이들의 권익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권익을 위해 싸워야 하며, 사람들, 특히 우리 문화가 자신의 자녀의 생명에 대해 한 거짓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예기치 못하게 임신한 여성들을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들이 이러한 사실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비판은, 진심 어린 연민은 축하하는게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의 자녀의 생명을 끝내버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권리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하는 여성들에 대해 "애통"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나왔다. 마치 진짜 문제는 이 특히 극악무도한 선택을 여성들로부터 빼앗는 데 있다는 것 같다. 낙태는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폭력적인 행위이다. 죽음의 문화에 깊이 중독된 사회만이 다르게 행동한다. 노예 해방 선언을 기념하는 행사도 막아야 하는가?
진짜 문제는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이 단순한 여론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는 점이다. 공감이 기독교인의 주요 미덕이 될 때마다, 도덕성은 흐려진다. "매력"이 있어 보이려면 왠지 "침묵"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업들로부터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인 엘리트 계층은 이 점을 완전히 분명히 했다(https://abcnews.go.com/.../top-companies-respond.../story...). 낙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고, 단순히 '생명 옹호론자'이고, 분열적인 언사로 불필요하게 이웃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치명적인 낙인을 동반한다.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태아를 죽이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일부 기독교인들로부터 도덕적 반감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공개적으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불균형은 생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 최악의 신념에 속고 있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생명을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인 로버트 조지(https://fedsoc.org/contributors/robert-george)는 학생들에게 그가 묻는 질문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만약 여러분이 남북전쟁 전에 태어났다면, 노예제도를 받아들였을까요, 반대했을까요? 거의 모든 학생들은 즉각적으로 노예제도를 반대했을 것이고 이를 해체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이건 말도 안 된다. 이 학생들이나 우리 중 극히 소수만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거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조금 노력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도덕적 우위를 주장하는 학생들을 믿는다면, 오늘날 어떤 맥락에서 그들이 그러한 도덕적 입장으로 인해 동료들과 함께 서지 못하게 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기관들의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험악한 이름으로 불리며, 소중한 직업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그 인기가 없는 불의의 희생자를 위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에 대한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명확성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호감을 잃어버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로 대 웨이드 사건의 결말은 실제 승리라기보다는 문제처럼 느껴진다.
물론, 지금부터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는 일은, 단순히 생명을 옹호한다는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위기의 임신 지원 센터를 충분히 도움이 되는 수준으로 지원하고, 위험에 처한 산모를 보호하며, 모든 아이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인간의 번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하는 삶은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할 일이 매우 많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도 오랫동안 우리 문화에 너무나 나쁜 영향을 주었던 생명에 대한 법적 장애물의 종말은 여전히 축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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