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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선택"의 무게

Writer: Sang LeeSang Lee

너무나 많은 "선택"의 무게

1. 영어 원문 스크립트와 오디오 서비스


2. 한국어 번역 스크립트와 음성 서비스

(1) 음성 서비스:

https://youtu.be/9XvGlkM43-g

(2) 한국어 번역 스크립트:

"이 주의 브레이크포인트(https://www.breakpoint.org/breakpoint-this-week/)" 팟캐스트의 고정 청취자라면 나와 공동 진행자인 마리아가 리얼리티 게임 프로그램인 '나홀로(https://www.history.com/shows/alone)'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프로그램은 10명의 야생 전문가들이 대개 춥고 곰도 많고, 어딘지 모르는 지역에 버려진 채,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 곳에 가장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이긴다. 가장 최근 방영된 시즌에서는, 강력한 생존 기술과 해외에서의 폭넓은 경험을 가진 참전 용사 한 명이 우승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몇 주 만에 그만둔다고 했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그는 "군대에서 가족과 떨어져 있을 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무전기나 전화로 '내가 편한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기회가 있었다." 즉, 집에 갈 수 있는 선택권 때문에 버티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통념에 따르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문화적 순간에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생각을 따른다면, 그 정반대가 되었어야 했다. 더 많이 통제할 수 있고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진다면 인생은 더 쉽고 더 만족스럽게 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사실 모더니즘 이후 나타나는 삶의 특징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미국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1976년에 쓴 글(https://www.goodreads.com/book/show/1427231.Pyramids_of_Sacrifice)에서, 특히 서구인들에게서 무엇이 변했는지 확인해 주었다. 과학 기술이 가져온 극적인 진보 덕분에 현대의 인간은 세계를 결국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약 완전히 이해가 된다면, 또한 완전히 제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버거는 "예전에는 운명이라 여기던 것이 이제는 선택의 장이 되었다"고 썼다.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의 문제가 기술적인 문제로 바뀔 수 있다는 가정이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후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선택에 대한 강박관념이다. 위험이 클수록 자유에 대한 환상은 더 극심해진다. 지금은 뒤집혀진 "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 판결(https://supreme.justia.com/cases/federal/us/505/833/#tab-opinion-1959105)에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은 이러한 충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자유의 중심에는 존재, 의미, 우주, 인간의 생명의 신비를 자신만의 고유한 개념으로 정의할 권리가 있다." 그가 보기에 "선택의 자유"는 심지어 무엇이 실제인가를 선택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된다. 지금 사람들의 선택이, 성적인 행위를 넘어 성적 정체성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믿는 것이 놀랄 일인가?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 무한한 선택권 덕택에 통제할 수 있고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나홀로' 프로그램에 나왔던 장교는 어째서 그 정반대의 경우가 맞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의 선택의 자유는 왜 그렇게 크게 부담이 되었을까? 왜 그렇게 많은 연구 결과에서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덜 행복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가? 우리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 식의 주장은, 타락한 인간성에 내재되어 있으며 특히 현재 극심한 약점을 이용한다. 우리는 만족을 지연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존재를 정의할 수 있다거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우리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 결혼 생활을 계속할지, 태아를 정말 낳을지에 대한 선택은 우리의 신중한 성찰에 근거하는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의 번영을 희생시키면서 현재의 안락함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우리는 쓸 수 있는 것을 다 써 버린다. 케네디 대법관은 틀렸다.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선택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세상을 다시 만들 수는 없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우리는 창조의 한계에 부딪친다. 기독교 세계관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물리 법칙과 도덕률, 신체, 특정한 지리적 위치와 역사 속에서의 시간과 같은 제한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정한 부모, 형제자매, 자녀들을 지정해 주셨고, 이들의 특정한 요구는 끊임없이 우리의 선택에 제한을 가한다. 비록 현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러한 한계를 가능한 모든 과학 기술로 저항하고 맞서 싸워야 하는 저주라 불러도, 진정한 자유는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면 모두에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제한하신 것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안식할 때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면 그분이 정하신 한계는 짐이 아니다. 그것들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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