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를 노예제도처럼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늘날 대부분의 세계에서 노예제도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낙태도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한때 노예 소유가 합법적이었던 주와 불법이던 주들이 있었던 것처럼, 미국은 이제 각 주 단위에서 낙태 문제에 있어 깊이 분열되었다. 어떤 주는 낙태를 허용하고 장려하며 심지어 보조한다. 다른 주에서는 낙태가 거의 불법이다. 로 판결 이후의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할 때 노예제 폐지와 낙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교회가 역사적으로 취해 온 입장으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분명히 초대 교회는 노예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은 노예 무역에서 고질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에 대해 비난한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노예 소유주가 기독교인인 노예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암시를 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특히 노예를 해방시킬 목적으로 노예를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과 초대 교회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노예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첫째, 이미 표적이 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공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달갑지 않은 관심을 더 많이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둘째, 노예가 없는 사회의 모범이 고대에는 없었기 때문에, 노예가 없는 세상이 어떨 것이라 상상할 수 있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노예제를 저주라고 생각했지만, (질병이나 가난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예제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상상력의 실패로, 복음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 지도자들이 노예제 폐지를 위한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이끌기까지 수 세기가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중세 유럽에는 공공연한 노예제가 드물었고, 교회 지도자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했다. 토마스 아퀴나스(https://www.newadvent.org/summa/3057.htm)는 노예제도가 "국가의 실정법"이 될 수는 있지만, 자연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죄악이라고 주장했다. 수세기 후 악명 높은 대서양 노예 무역이 시작되었을 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식민지에 노예제도를 퍼뜨리기 위해 네 명의 다른 교황의 법령을 무시했다. 영어권에서는 노예제도가 만연하자 퀘이커 교도들의 반감을 샀고, 복음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노예 무역을 먼저 금지시킨 다음, 노예제도를 완전히 없앴다.
이 모든 일들은 노예제도를 옹호한 미국의 신학자(https://breakpoint.org/the-slavers-bible/)들이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문화의 선례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영향이 분명해지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평등하다는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은 노예제가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기독교 국가에서의 노예제 폐지는 시간문제였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헌신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노예제도의 남용을 없애기 위해 싸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낙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은 시작부터 분명했다. 신약성경이 아닌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서인 디다케(https://www.earlychristianwritings.com/didache.html)의 글에는 기독교인들은 "낙태로 아이를 살해하거나 태어난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이와 비슷하게,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쓰여진 바나바의 서신(https://www.earlychristianwritings.com/text/barnabas-lightfoot.html)에는 "당신은 낙태로 아이를 살해할 수 없으며,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다시 죽일 수도 없다"고 쓰여 있다. 아테네의 아테나고라스는 177년에 쓴 《기독교인을 위한 탄원(https://www.newadvent.org/fathers/0205.htm)》에서 "낙태를 하기 위해 마약을 사용하는 여성들은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익명의 저작인 베드로의 계시록, 테르툴리아누스, 히폴리투스, 키프리아누스, 락탄티우스의 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이 발견되며, 이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낙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분명했고 20세기까지도 지속적으로 분명했다.
최근에 와서야 일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낙태를 도덕적으로 합법(https://erlc.com/resource-library/articles/5-facts-about-the-history-of-the-sbc-and-the-pro-life-cause/)이라 받아들였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 낙태를 축하했다(https://www.episcopalchurch.org/ogr/episcopal-church-statement-on-reports-concerning-supreme-court-case-pertaining-to-abortion/). 기독교인들이 낙태를 반대한 근거는 기독교인들이 노예제도를 반대와 근거와 정확히 같은 추론에 기반해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영광과 명예의 관을 쓰고 있으며, 우리가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노예가 인간으로서 가치가 열등하다는 생각, 더 나아가 짐크로법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끔찍하게 처우했던 사고를 뒷바침했던 그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주장이 낙태를 옹호하는 사고에서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노예제도의 사슬을 끊었던, 하나님의 형상에서 나오는 그 자유하게 하는 능력은, 우리가 태아의 존엄성을 보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노예제와 그에 따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했던 것은 악한 일이었으며, 이 두 가지를 끝내기 위한 운동은 하나님의 일이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우리는 또한 태아를 인간이 아니라고 하며 죽이는 것은 최소한 사악하며 당연히 혐오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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