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가 "질병"인가?
잠언의 저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잠언 18:21)."라고 기록했다. 언어의 사용법과 단어의 정의를 바꾸려는 노력이 가장 자주 수반되는 문화적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하버드 의대 분자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싱클레어는 연구실 속 혁신과 언어의 혁신을 결합시키고 있다. 최근 CNN 기사(https://www.cnn.com/2022/06/02/health/reverse-aging-life-itself-scn-wellness/index.html)에서 싱클레어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한 사람은, 싱클레어의 연구의 목표가 "노화"라는 단어의 정의를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노화를 질병으로 만들기" 원한다.
싱클레어는 성체세포를 줄기세포로 되돌려 생쥐의 노화 과정을 중단시키는데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비록 더 제한적이긴 하지만 일부 동물들은 이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설계된다. 잘린 다리를 다시 자라게 하는 문어가 한 예이다. 싱클레어가 "고대 재생 시스템"이라 부르는 이와 동일한 생각을 사용하여 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악화되는 세포를 재생시키기 원한다. 이미 그는 나이 든 쥐의 안구 세포를 고쳐서 "젊은" 시력으로 회복시켰다.
물론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노화 방지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비록 싱클레어가 사용한 프로세스 상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언론 보도에서 거의 문제삼지 않았던 부분은 싱클레어의 핵심 목표였다. 즉 오늘날 많은 의학윤리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 관점에서의 의료윤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기독교인들이 타락의 결과를 극복하려고 하는 데이비드 싱클레어와 같은 연구의 측면을 긍정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성경에서 죽음은 적이며 인간은 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종종 의학적 진보에 영감을 주는 탐구에 수반되는 독창성과 열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싱클레어와 같은 사람들을 모욕하듯이 "하나님 노릇을 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창세기 1장과 2장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처럼 행동"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인 척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결국 그의 창조물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사역은 계속된다. 하나님의 세계의 정원을 세우고 만들고 가꾸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반영하는 도덕적 한계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체계 안에서 죽도록 만들거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은 큰 악이다. 그러나 죽음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려는 시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전례 없는 악한 행위의 결과였지만 아버지의 뜻에 예수님께서 순종하는 맥락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도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 발자취를 따라왔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같이, 죽음을 피하는 것보다 더 높은 어떤 도덕적 선함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일들을 바르게 지키는 일은 "노화를 역행"시키려는 약속 같은 기술들을 윤리적으로 추구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생명윤리학자이자 신학자인 길버트 마일렌더는 저서인 "생명윤리: 기독교인을 위한 입문서(https://www.barnesandnoble.com/w/bioethics-gilbert-meilaender/1135077206?ean=9780802878168)"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의학적 진보를 추구할 자료를 죽음과 같은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로 보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번영을 위해 세우신 길에서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일할 자유가 있다. 이는 사실 매우 자주,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을 묘사하신 것처럼) "무엇이든 그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마일랜더는 기독교인들에게 단순히 우리의 몸을 돌보는 방법만이 아니라, 몸을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의약품을 사용하려는 유혹에 맞서 싸우라고 충고한다. 만약 의학적 연구와 행위의 주요 목적이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반드시 도덕적으로 타협하게 된다. 뱀은 이브에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지만 죽음을 면할 것이라 약속했었다. 그것은 거짓말일 뿐 아니라 충분한 명분도 없이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권위를 찬탈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의학적 연구와 의료행위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몸과 시대, 장소, 한계 속에서 사람들이 번영하는 것을 도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시작부터, 마일렌더는 '기독교적 동정심을 좌우하는 원칙'은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목적은, 고통이나 죽음이 타락의 결과이자 우리가 반대해야 할 것이지만,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것들을 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의 고난조차 선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 우리는 몰락한 이 세상의 냉엄한 현실을 깊이 슬퍼하면서, 창조와 부활이라는 더 큰 맥락 안에서 그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며, 삶이 단순히 죽음에 대한 전제조건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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