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기계가 없는가, 가스실이 없는가?
- Sang Lee
- Apr 26
- 3 min read
자살 기계가 없는가, 가스실이 없는가?
2025/12/10 - 존 스톤스트리트/티모시 패짓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piJRPfqRIHU
(2) 번역 스크립트 :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에벤에저 스크루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금하러 다니는 두 남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감옥이 없는가?… 공영 빈민 수용소가 없는가?... 그런 시설들이 아직 운영되고 있지 않는가?” 자선 모금가들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곳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자, 스크루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차라리 죽고 싶어 한다면 … 그렇게 해서 잉여 인구를 줄이는 편이 낫지.”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스크루지는 자신이 했던 비인간적인 말을 다시 떠올리고는 그 말을 했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영국에서, 소로턴의 팔코너 경(Lord Falconer of Thoroton)은 영국 상원에 가난한 사람들은 죽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력 자살을 원하는 이유가 자신의 처지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면, 예를 들어 가난하기 때문이라면, 가난하다는 이유로 조력 자살을 금지당해야 하는가?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영국의 국영 의료체계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술 비용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팔코너 경의 발언은, 가난하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죽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가난은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으로 취급된다.
아마도 팔코너 경은 자신의 주장이 『크리스마스 캐럴』의 자선 모금가들처럼 자비심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조언은 스크루지의 말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안락사할 병원은 없는가? 가스실은 없는가? 그런 시설이 아직 운영되고 있지 않는가? 가난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면, 그들은 그렇게 하는 편이 낫지.”
물론 팔코너 경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자살 포드(사람이 스스로 작동시켜 질소 가스를 흡입함으로써 사망에 이르게 되는 기계 장치)로 몰아넣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살 포드 자체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다는 상태’ 역시 점점 늘어나는 “살 가치가 없는 삶”의 목록에 추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몇 년 전 캐나다와 콜로라도에서 안락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했을 때, 그들은 이것이 말기 질환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곧 죽게 될 사람들을 위한 자비로운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고통을 왜 더 연장해야 하느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 경사는 그 어떤 것보다 미끄럽다. 캐나다와 콜로라도 모두에서, 죽을 사람들 명단에 오를 수 있는 기준은 계속 확대되어 왔다. 콜로라도에서는 심각한 섭식장애도 해당된다. 조력 자살을 일찍 도입한 국가인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가 병든 어린이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2022년에는 테러 공격에서 살아남은 한 벨기에 여성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사형당하지 않았다.
캐나다에서는 ‘의사 조력 자살(MAiD)’이 이제 다섯 번째로 흔한 사망 원인이 되었다. 2016년 캐나다 정부는 ‘임박한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만이 대상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2023년이 되자 그 범위는 정신질환과 약물 중독으로 고통받는 환자들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지난해 한 캐나다 남성은 자신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죽음을 선택할 자격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몇 주 뒤 또 다른 사례에서는, 한 젊은 여성이 자폐증을 이유로 죽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판사는 그에게 의사 조력 자살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회복 불가능한 해악”을 초래할 것이라고 판결했는데,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음보다 죽음이 덜 해롭다는 뜻처럼 들린다.
앞으로 또 어떤 인생의 시련들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규정될 것인가? 힘든 이별? 원하던 직장을 얻지 못한 일?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우리는 한때 나치 정권이 누구를, 왜 죽였는지를 강력히 비난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들의 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무한한 존엄과 가치를 가진 존재다. 건강한 사람만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만도 아니다. 인간의 가치는 고통이나 질병, 혹은 팔코너 경이 말한 가난으로 인해 줄어들지 않는다.
이 시대에 교회의 사명은 분명하다. 교회는 생명을 긍정해야 한다. 취약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효용성으로 재단하는 공리주의적 사고를 거부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했듯이, “백 년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녀나 노인을 죽이지 않는 사람들로 기억된다면, 우리는 옳은 일을 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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