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에 나온 명언: 제한이 없는 문명이란 없다. 1. 국문 오디오 http://youtu.be/SramZ_sT4PY 2. .국문 스크립트 문화가 성에 대해 이렇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정상적이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다. 성 소수자 인권의 달(Pride Month)로부터 교육, 포용과 다양성에 헌신한다는 의향을 드러내는 기업, 오늘날 생산되는 거의 모든 광고, 영화, TV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성 정체성은 마치 인간의 정체성과 목적, 행복의 중심인 것처럼 취급된다. 그리고 이런 삶과 세계에 대한 비전은 특히 사회적 실험의 대상인 아이들에게 강요된다.
"만약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가 불균형하게 많다면, 이렇게 될 것을 예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좋은 예는 옥스포드의 사회학자 J.D. 언윈(https://en.wikipedia.org/wiki/J._D._Unwin)이다. 1939년, 언윈은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요약하여 기념비적인 책을 출간했다. '성과 문화(https://reaction.la/Sex+and+Culture-Searchable.pdf)'는 5천 년 동안의 80개 부족과 6개 역사적 문명을 "한 문화의 성적 해방이라는 관념이 그 문화의 번영이나 몰락을 예견하는가?"라는 질문의 관점을 통해 살펴보았다."
"사회가 발전하다가 점차 쇠락한 상태로 사라져 갔듯이, 각 사회에서 결혼이 처음에는 상호 동의에 기초한 일시적인 관계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평생의 결합으로 바뀌었고, 그 후 느슨한 결합이나 일부다처제로 돌아섰다. ”
게다가 언윈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류의 역사상 완전히 일부일처제가 되지 않은 상태로 문명화가 되었던 단 하나의 집단의 사례를 찾을 수 없다. 게다가 덜 엄격한 관습을 채택한 이후에도 그 집단이 그러한 문화를 유지한 사례도 없다.
언윈은 흐트러진 사회의 이면에 있는 패턴을 보았다. 만일 결혼과 배우자에 대한 신의(정절)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성적인 구속을 3대가 연이어 버리면 그 사회는 무너졌다.
간단히 말해서 성생활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성적 취향은 매우 강력한 힘이어서 통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미래를 안전하게 지키기보다는 파괴할 수 있다. 잘못된 성행위는 개인과 사회 전체에 파괴적이다.
언윈의 결론은 하나의 쟁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람들은 만족을 지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현재에만 집중하는가? 문화가 성적인 본능을 억제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미래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에 대해 덜 생각하고, 대신 성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다음 세대의 안정과 생산성, 웰빙을 위태롭게 만든다.
언윈은 이 연구에서 그가 도덕적이거나 이념적인 다른 목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는 옳고 그름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없다"고 썼다(https://www.christianitytoday.com/.../december12/4te080.html).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그의 결론과 마찬가지로 심오하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그 결론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퓨 리서치(https://www.pewresearch.org/soc.../2010/11/18/v-children/...)에 따르면, 1960년에는 거의 90%의 아이들이 혼인 상태의 양친과 함께 살았다. 2008년에는 그 비율이 64%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동안 미혼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비율은 5%에서 41%로 증가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연구(https://www.survivedivorce.com/divorce-effects-children)에 따르면 한부모 가정이나 혼합 가정의 청소년들은 심리적인 도움이 필요할 가능성이 세 배나 높고 고등학교를 중퇴할 확률이 두 배 더 높으며, 자살할 가능성도 더 높다. 이 아이들은 결국 부모보다 대학 교육을 덜 받게 되며 임금이 더 낮은 직업을 갖게 되고 이혼할 가능성도 더 높다.
이것은 전통적이지 않은 가정의 아이들이 잠재력이 떨어지거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안정된 양친 부모가 있는 가정이라고 아이들에게 좋은 성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통계가 개인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미래를 파악해 줄 수는 있다. 문명적인 차원에서 미래는 산수의 문제이다.
성혁명의 초기에는 성행위의 도덕성을 재구성했지만, 오늘날에는 더 나아가서, 이미 신세대에게 취약한 이들의 정체성을 훼손시켰고, 끊임없이 늘어만 가는 성 정체성의 약어들의 다양한 방향으로 정체성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5분의 1에서 거의 40%(https://www.newsweek.com/nearly-40-percent-us-gen-zs-30...)가 본인들을 LGBTQ로 인식한다. 아니면, 최근 들었던 동북부의 한 중학교 반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전부 그렇다."고 한다.
이 문화적인 순간에 기독교의 신실함은 아이들을 보호하고 사회의 미래에 대해서도 헌신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은, 특히 그렇게 하는 것이 인기가 없을 때, 더 크게 목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고 상황이 더 나빠질 거라서,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필연성 논제"를 거부해야만 할 것이다. 용기와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우리는 진리를 계속 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와 서로에게 명백해야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즉 후기 성혁명의 사상과 행동 방식은 정상이 아니며, 성행위에 대한 끌림과 관심이 인간의 존재와 가치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의 성은 속도 제한과 같은 임의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중력처럼, 인생의 구조의 일부이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땅바닥에 부딪히는 고통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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