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의 생일을 맞이하며
- Sang Lee
- Mar 5
- 3 min read
볼테르의 생일을 맞이하며
2025/11/17 - 존 스톤스트리트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I-nl5ILcjaw
(2) 번역 스크립트 :
금요일은 『캉디드』를 비롯한 계몽주의 시대의 영향력 있는 작품을 쓴, 뛰어나고 빈정거리는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331번째 생일이었다. 볼테르는 특히 기독교를 공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 ‘리스본 재난에 부쳐’라는 시에서 악과 고통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저명한 역사학자 존 우드브리지 박사에 따르면, 볼테르가 진정으로 위험했던 이유는 비웃을 거리가 아닌 것들을 독자가 비웃도록 만드는 능력 때문이었다.
만약 볼테르가 어떤 “10년대”였다면, 그는 1990년대였을 것이다. 이유를 설명하겠다.
다이앤 웨스트는 2008년에 출간된 『어른의 죽음: 미국의 정체된 발달이 서구 문명을 몰락시키고 있다』라는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썼다.
“기록 그대로, 어느 시대에는 실제로 ‘십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말은 십대 나이의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의 요지는 ‘청소년기(adolescence)’라는 독립된 단계가 20세기 중반의 심리학·대중문화·대량 마케팅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청소년기는 전통적으로 성인이 되어 가는 ‘통과 의례’를 대체해 버렸고, 그 결과 사람들은 “피터팬 신드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 대부분의 문화에서 십대들은 더 성숙하게 행동하기를 기대받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성숙을 돕고 뇌의 중요한 연결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웨스트가 말하듯,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어른들이 십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옷차림, 행동, 소비 습관까지 말이다. 그 결과 우리는 17세, 18세 청소년들에게 기대하는 수준을 낮추고 말았다. “어차피 애들이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웨스트의 책은 원래 2001년 말에 출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9·11 이후 그녀는 책을 전면 수정했다. 기존의 주장 “우리는 청소년의 문명이다”는 “우리가 청소년의 문명이 되었기 때문에, 급진적 이슬람의 부상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로 확장되었다. 즉, 문명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었던 바로 그 시점에 우리는 오히려 미성숙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혹은 청소년적 문화)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불경(irreverence)이다. 1990년대는 바로 그 불경함의 시대였다. 포스트모던 영화와 TV는 의미 없음 자체를 찬양했다. 1980년대 가족 중심 시트콤처럼 매회 교훈을 남기는 프로그램은 사라졌다. 1970년대 규칙에 반항하던 십대 캐릭터도 사라졌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비비스와 버트헤드(Beavis and Butt-Head)였다. 그들은 무언가를 미워할 만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1990년대 시트콤과 SNL 기반 영화들은 모든 것, 심지어 성(性)까지도 농담거리로 만들었다. 그것도 크게 웃을 만큼 재미있는 농담이 아니라, 의미 없는 키득거림이나 빈정거리는 “헤헤”식 조롱이었다.
사람이나 사회를 이해하려면 무엇을 보고 웃는지를 보라.
모든 것이 농담이라면, 거룩한 것은 하나도 없다. 거룩한 것이 없다면, 싸울 가치가 있는 것도 없다. 싸울 가치가 없다면, 목숨을 걸 가치도 없다. 목숨을 걸 가치가 없다면, 살아갈 가치조차 없다.
명확히 하자면, 문제는 유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유머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에 웃는가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기쁨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의미가 너무 적어서이다.
1990년대 말 출간된 토머스 힙스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관한 쇼들: 「엑소시스트」에서 「사인펠드」까지 대중문화 속 허무주의』에서 그는 미국 대중문화에 퍼진 허무주의를 “영적으로 빈곤하고, 열망이 축소된 상태”라고 묘사했다. 힙스는 당시 대중 오락에 스며든 허무주의가 한 세대를 형성했다고 보았다. 당시에 하버드의 한 학생은 「비비스 세대」라는 하버드 크림슨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 사회의 모든 결점을 완전히 이해하는 새로운 세대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비웃는 것뿐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1990년대였다. 프로그램들은 재미있었고, 사회의 “결점들”도 지금과 비교하면 단순했다. 냉전은 끝났고, 세계는 평화로운 것처럼 보였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은 아직 예측에 불과했고, 편안한 자리에 있는 학자들은 그마저도 의심했다. 클린턴이 대통령이었고, 미국은 부유하고 안전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니르바나와 앨러니스 모리셋의 우울한 노래를 들으며 현실을 잊고 “삶이 참 불행하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위험이 훨씬 더 크다.
물론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오락”만으로 오늘의 ‘삶은 의미 없다’는 생각의 확산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남성과 여성을 조롱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건강한 신체를 절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MTV식 카메라 워크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했던 것은 늘 불쾌했지만, 오늘날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OnlyFans에서 자신의 몸을 상품화하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순한 편”으로 보일 정도이다.
1990년대의 불경함이 오늘날 칼 트루먼이 말한 “현대 문화의 신성모독(desecration, 거룩한 것의 파괴)”으로 이어진 것에 완전히 직선적인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둘 사이의 연결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리고 그 연결을 단순한 ‘둔감화’로만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볼테르가 성스러운 주제를 조롱하여 독자들이 종교적 경외심을 잃게 만든 것처럼, 불경함이 사회에서 정상화될 때, 사람들은 거룩한 것을 인식하고, 삶과 사회를 그에 맞게 질서 잡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볼테르의 유산은 지금도 여전히 보인다. 1990년대 재방송 속에서뿐 아니라, 오늘날의 좌우 진영의 ‘워크(Woke)’ 문화 속에서도, 니키 글레이저와 닉 푸엔테스의 조롱 속에서도, 성스러움의 상실과 신성모독 속에서도, 이성적 논쟁이 조롱과 모욕으로 대체된 언어 속에서도, 그리고 결국 인간의 마음이 정말 필요로 하는 진짜 유머의 상실 속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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