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없는 '여분의 신체 조직'에 대한 윤리
- Sang Lee
- Jul 20
- 3 min read
뇌가 없는 '여분의 신체 조직'에 대한 윤리
2025/04/28 - 존 스톤스트리트/셰인 모리스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9kG3VAUZrJ4
(2) 번역 스크립트 :
최근 시험관 아기와 대리모 출산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훨씬 더 이상하고 디스토피아 같은 기술들이 등장했을 때, 더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래 선하게 설계된 몸에 대한 견고한 신학이 없다면, 우리는 이런 기술들을 거부해야 할지, 통제해야 할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할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최근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서는 인간의 장기를 이식용으로 쓰기 위해 의식이나 뇌가 없이 인간의 신체를 자라게 하는 기술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스탠퍼드 대학 소속의 세 연구자에 따르면, 이러한 “여분의 신체 조직(spare bodies)”을 만드는 기술은 생각보다 가까운 미래일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대중과 입법자들이 지금부터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사에 따르면 “최근의 생명공학의 발전은 인간이 생각하거나 인식하거나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신경 요소가 없이도 살아있는 신체 조직을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들은 이를 “바디오이드(bodyoids)”라고 부르며, 만능줄기세포를 통해 배아를 모방하고, 유전 기술로 뇌 발달을 억제하며, 인공 자궁 기술을 활용해 이러한 신체를 키울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기술들이 결합되면, “통각이나 의식이 없는 인간의 신체를 사실상 무한정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 가능성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을 연구자들도 인정하지만, 이들은 잠재적 이익이 위험보다 크다고 많이 들어 본 주장을 한다. 바디오이드는 새로운 약물을 승인받거나 장기 이식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시간을 단축시키며,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경고하는 영화들은 이미 많다. 마이클 베이의 "아일랜드"는 실제 세계의 고객들이 장기를 얻기 위해 폐쇄된 공간에서 복제 인간을 키우는 이야기로, 이런 상황을 소름 끼치도록 예견했다. 그 영화에서는 복제 인간이 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윤리적 갈등이 생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차이점일까? 만약 이들이 실제 배아가 아니라, 배아처럼 행동하는 성체 줄기세포로 만들어졌다면? 이들이 온전한 신체가 아니라 단순한 장기들의 조합이라면? 이는 과거 생명윤리학자들이 찬성했던 줄기세포 연구와 다른가?
설사 바디오이드가 단순한 예비 부품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한 사람의 신체에 얼마나 많은 부품을 이식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어느 수준까지가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논의의 편의를 위해, 바디오이드가 사람의 대부분을 대체할 수 있고, 심지어 더 나은 기능을 하여 노화를 지연시키거나 되돌릴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인가? 건강에 대한 추구는 어느 순간 불멸에 대한 추구가 되는가? 인간의 신체는 단지 부품들의 총합에 불과한가?
이런 ‘여분의 신체 조직’에 대한 욕망 뒤에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하는 현대판 영지주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신체는 의식이 있거나 통증을 느낄 수 있을 때만 인간이라는 전제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생명공학 위기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특히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 정도의 윤리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시험관 아기나 대리모, 혹은 이른바 ‘불임 치료’와 관련된 논쟁, 피임약이 도입된 이후의 성과 자녀에 대한 현대적 시각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답할 방법조차 없다.
가톨릭에서는 바오로 6세 교황의 "생명의 존엄(Humanae Vitae)",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 같은 문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내용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문서들은 신학적으로나 윤리적·과학적으로 깊이 있는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 대부분이 이러한 신학에 따라 일관되게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예 명확한 신학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과학소설 같은 기술이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지금, 기독교인들은 생명윤리와 인간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뇌 없는 바디오이드’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신학 없는 뇌와 몸’이 되어선 안 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거나 착취하거나 비인간화하는 기술에 저항할 방법조차 잃게 될 것이다.
심지어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자들도 “윤리적·사회적 문제는 과학적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해서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쓴 다른 내용을 보면 그 말에 진심은 아닌 것 같지만, 그 문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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