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울프' 영화의 불운한 결말
- Sang Lee
- Jul 22
- 2 min read
'다이어울프' 영화의 불운한 결말
2025/05/08 - 존 스톤스트리트/셰인 모리스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wVbf91Id3x0
(2) 번역 스크립트 :
최근 TIME 잡지는 생물공학 기업 '콜로설'이 수천 년 전에 멸종한 다이어울프를 부활시켰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레무스다"라는 자막이 튼튼해 보이는 흰색 늑대 사진 위에 적혀 있었다. "이것은 다이어 울프다. 1만 년 만에 처음으로 존재하는 개체다." 콜로설에 따르면 이는 털북숭이 매머드 등 오래 전에 멸종한 다른 동물들을 부활시키는 첫 단계다.
하지만 이 헤드라인은 과장된 표현이다. 레무스, 그의 형제 로물루스, 그리고 그들의 여동생 칼리시는 다이어울프의 DNA를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현대의 회색 늑대 유전자에 다이어울프의 DNA를 모방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개체다. 이들은 HBO의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거대 늑대와 닮게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타임 기사에서 가장 흔한 댓글은 "이 영화는 이미 봤고, 결말은 좋지 않았어요"라는 내용의 변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쥬라기 공원》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한 회사는 유전공학 기술로 공룡을 부활시킨다. 스포일러 주의. 결말은 좋지 않다. 실제로 이 시리즈의 7번째 작품이 올여름 개봉될 예정이며, 1993년 원작과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반드시 그걸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편의 영화가 유전자 조작, 인간 리엔지니어링, 과학적 오만의 위험을 반영해 왔다. 《모로박사의 섬》부터 《가타카》, 《혹성탈출》, 《아일랜드》까지, 심지어 제작된 좀비 영화의 절반 이상이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해 경고했다.
이것은 단순히 감독들이 주제를 화려하게 꾸민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예술에 담긴 놀라운 지혜가 과학자와 선구적 기술자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간과되었을 수도 있다. 트위터에서 유행한 한 밈은 가상의 공상 과학 소설 작가가 "내 책에서 나는 경고성 이야기로 '토먼트 넥서스'를 발명했다"고 말한 장면을 인용한 후, 기술 회사 임원이 "드디어 마침내 우리는 고전 SF 소설 《토먼트 넥서스를 만들지 마라》에서 영감을 받아 "토먼트 넥서스를 창조했다"고 발표하는 내용이다. 더욱이 대중문화가 과학적 진보의 부정적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과 우리가 실험 대상이 되기를 자청하는 전반적인 태도 사이에는 이상한 괴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의료 기술만큼이나 인공지능(AI)에도 적용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부터 《A.I.》, 《터미네이터》, 《아이, 로봇》,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까지, 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한 경고를 받아왔다. 《월-E》는 기술에 의존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인간성을 잃을 것이라 경고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가상현실에 빠져들지 말라고 했다. 《칠드런 오브 멘》은 사회가 충분한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묘사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감시 국가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모든 영화의 공통점은 그 경고가 현실 세계에서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이 영화 봤어, 결말이 안 좋았지"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목적이나 경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편안함, 편의성, 통제를 약속하는 새로운 기술을 계속 채택하고 있다.
경고가 정확하지 않거나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이 영화들은 종종 물을 가치가 있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우리의 호기심도 사라진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처럼,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과 창의성의 광범위한 영역을 거의 저항 없이 삼켜가고 있다. 《쥬라기 공원》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콜로설의 늑대는 동물이나 인간의 복지를 넘어 이익과 홍보를 우선시하는 생물공학 프로젝트의 첫 사례가 될 것이다.
필자가 자주 하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은 할리우드에 더 주목해야 할 때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쓰레기가 나오긴 해도, MIT, 의료 연구실, 실리콘 밸리에서는 부족한, '진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려는 의지가 존재한다.
C.S. 루이스는 이성은 이해하는 기관이고 상상력은 의미의 기관이라고 했다. 우리는 둘 다 필요하다. 그래서 영화에서조차 "무엇이 잘못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들을 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지 묻는 능력은 사라지지 말아야 할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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