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곧 동조다
- Sang Lee
- Sep 27
- 3 min read
침묵은 곧 동조다
2025/7/11 - 존 스톤스트리트/티모시 패짓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EvG3J4vl6po
(2) 번역 스크립트
최근 며칠 사이, 영국 의회는 말기 환자에 대한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키고, 임신 후기에 낙태하는 것도 ‘비범죄화’하는 법안도 가결시켰다. 도덕적 혼란에 빠진 소위 보수라는 야당의 도움을 받으면서,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닫는 노동당이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은 C.S. 루이스가 경고했던 것처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대해 피터 히친스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의회는 태아에 대한 훨씬 더 무자비한 낙태에 찬성표를 던지고는 바로 노인들을 살해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우리는 지금 죽음을 숭배하는 집단에 지배당하고 있는가?”
이러한 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행위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자주 도전적으로 말하듯, “100년 후에 그리스도인이란 아이들이나 노인을 죽이지 않는 사람들로 기억된다면, 우리는 잘 해낸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침묵뿐이었다. 앤드류 워커가 재치 있게 말했다. “영국 성공회는 자기가 이미 잃어버린 문화엔 자랑스럽게 사목 서비스를 제공하고, 비굴하게 의존하고 있는 의회엔 순응하며, 결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법률엔 설교만 하고 있다.”
이 책임은 영국 성공회만의 것이 아니다. 2008년, 몇몇 중요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콜로라도 주에서 의사조력자살 법안에 반대하도록 목회자들을 교육하고 행동에 나서게 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당시 이 사안은 강대상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법안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다. 오늘날 콜로라도 주는 부모의 동의 없이도 청소년들에게 사춘기 억제제와 호르몬 치료를 영구적으로 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이 그 과정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도록 강요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아동에 대한 국가 차원의 성적 학대가 ‘너무 정치적’이라 말하며 침묵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2008년 이후 현재까지, 일부 목회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동성결혼 문제에 대해 좀 더 입장을 취하기는 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동성결혼식을 집전하도록 강요받거나, 교회에서 이를 열도록 강제당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회자가 동성 ‘결혼식’에 강제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면, 평신도 또한 케이크를 만들어 주거나, 꽃을 장식해 주거나, 웹사이트를 디자인하는 데 강제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연결 고리를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참여를 요구받은 것은 평신도였다. 그들은 괴롭힘을 당했고, 위협을 받았다. 비극적으로 이들 중 일부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했고, 이들의 목회자들은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잊혀진 것은 종교개혁 시기에 회복되었던 혁명적 사상, 즉 우리의 일은 거룩한 것이든 평범한 것이든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상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이라는 개념이다. 모든 직업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최근 문화적으로 분열적인 이슈들 가운데,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낸 이들도 있었다. J.K. 롤링은 소셜미디어에서 여성들을 대변했고, 클로이 콜은 미성년자 시절 진보적 의료 개입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탈성전환자로서 그 속임수와 학대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라일리 게인스는 여성 수영선수로서 자신과 다른 여성들이 겪은 부당한 대우뿐 아니라, NCAA로부터 사생활 침해를 당한 일에 대해서도 강하게 항의했다.
이 외에도 목소리를 낸 이들은 있었고,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충분한 수의 목회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냈는가? 더 중요한 질문은, ‘정치적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외면당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소리를 냈다가 ‘관여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는가?
‘해고당할 각오를 한 신학’ 외에도, 이제는 ‘인기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신학’이 필요할 때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까 봐”라는 가상의 위험에 좌우되게 하기보다는, “거짓에 따라 살지 않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는 선한 의도가, 결국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는 일로 후퇴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야고보서 3장에서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썼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특정한 시대와 장소를 위해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말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도 포함한다.
목회적 리더십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지금은 특히 더 그렇다. 영국에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현재의 영국 의회는 ‘죽음의 의회’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곳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 관건이다. 우리는 항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하며,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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