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슬 컬처(문화)가 암살 문화가 된 것인가?
- Sang Lee
- 23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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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슬 컬처(문화)가 암살 문화가 된 것인가?
2025/9/4 - 존 스톤스트리트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WZ3a7ddUxcs
(2) 번역 스크립트 :
2025년 8월 27일, 미니애폴리스의 ‘수태고지 가톨릭 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은 여러 면에서 충격적이다. 희생자 대부분이 기도 중이던 어린이였으며, 범인은 증오로 가득 찬 선언문을 작성했을 뿐 아니라, 무기에도 혐오 표현을 새겨 넣었다. 자신이 무엇을, 왜 저질렀는지를 세상에 분명히 알리고자 한 것이다.
정신 질환이 일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지만, 정치적·사회적 이념이 그 행위를 부추긴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는 일부에서 ‘암살 문화(Assassination Culture)’라 부르는 현상의 최근 사례이며, 이른바 ‘캔슬 컬처(Cancel Culture)’에서 한 단계 진화한, 더욱 불길한 형태다.
캔슬 컬처가 디지털 공간에서의 사회적 압력을 통해 특정 인물의 목소리와 명성을 지우려 했다면, 암살 문화는 물리적 폭력을 통해 상대를 제거하고자 한다.
이 흐름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루이지 망조니는 대형 건강보험 회사 CEO 브라이언 톰슨을 살해했다. 그런데 그는 범죄자이기보다 일종의 ‘기이한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이유는 단순했다. ‘적절한’ 대상을 살해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보험회사의 CEO는 많은 이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여겨졌고, 톰슨의 유가족이 슬픔 속에서 위로를 요청했을 때, 대중은 오히려 가해자를 찬양했다.
필자는 이 사건을 들었을 때 곧바로 톰슨의 아내와 아이들 생각을 했다. 필자 역시 1년 전, 살인자 두 명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으며, 상상조차 어렵다. 필자의 경우, 주변의 사랑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톰슨의 가족도 그러했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2025년 5월, 워싱턴 D.C.의 유대인 박물관 밖에서 이스라엘 영사관 직원 야론 리슈킨스키와 사라 밀그림을 총격 살해한 엘리아스 로드리게스의 사례도 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는 체포 직전 케피예(아랍 스카프)를 벗으며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자유를!”이라고 외쳤다. 그는 “학살에 반대하는 우리는, 그 가해자와 동조자들이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고 썼다. 로드리게스에게 살인은 하나의 확성기였다.
2024년 7월 13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도 있다. 이 사건 직후, "#how’dyoumiss?" (어떻게놓침?)’이라는 해시태그가 X(구 트위터)에서 유행했다. 미국 내 대형 총기 사건 직후, 희생자 수가 적었다는 이유로 실망을 표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학교 총격범 로빈 웨스트맨이 무기에 직접 혐오 표현을 새겨 넣은 사건은, 정체성과 이념을 동일시하는 오늘날 사회의 병폐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암살은 하나의 사회운동이 되었고, 살인은 메시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탈진리(post-truth)' 시대는 감정과 취향을 진리보다 앞세운다. 그 결과, 사람의 사상과 정체성 사이의 경계가 무너졌고, 캔슬 컬처가 더 어두운 형태로 굳어졌다.
만일 어떤 사상이 잘못되었기에 그 사상을 지닌 사람의 인간성마저 부정된다고 믿는다면, 해시태그와 플랫폼 퇴출에서 시작된 일은 총탄과 폭탄으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는 타인을, 수잔 하딩이 말한 바와 같이, "혐오스러운 문화적 타자"로 낙인찍는다. 그리고 그러한 ‘반동적 인간’에게 암살이란 ‘캔슬’ 방식이 왜 정당하지 않겠는가?
이 지점에서, 고대 성경적 진리가 오늘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생각과 기도”는 이러한 비극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며, 진심 어린 경우 적절한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은 이러한 표현이 무력하고 형식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람들은 말이 아닌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망조니, 로드리게스, 웨스트맨 역시 그들 나름의 ‘생각’에 기반해 행동했다. 이것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생각이 생명을 살리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기도는 무엇보다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마태복음 6:10).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창세기 1:27). 이 객관적인 인간 가치 기준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자신과 다른 신을 가진 자를 제거할 정당성을 찾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기도하는 가운데 회복이야말로 인간의 본래 가치를 이해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이 된다.
토머스 브래컨의 시 「Not Understood(이해받지 못함)」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오, 하나님! 사람들이 조금 더 명확히 볼 수 있다면,
아니면 보지 못한 것을 덜 가혹히 판단할 수 있다면,
오, 하나님! 사람들이 서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들은 당신께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며,
마침내 이해받게 될 것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상이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사상을 지닌 모든 사람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예수께서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 희생하신 사건은 암살 문화의 정반대에 위치한다. 이는 ‘생각에서 출발한 행동’의 극치이며, 우리가 예수를 본받는다면 그 희생적 메시지는 우리의 삶에 각인될 것이다.
어쩌면 그 메시지를 다른 이들이 알아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다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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