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버스 데이, 프리드리히 니체!
- Sang Lee
- Feb 2
- 3 min read
해피 버스 데이, 프리드리히 니체!
2025/10/15 - 존 스톤스트리트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9sr3W2WyeEI
(2) 번역 스크립트 :
1844년 오늘, 독일의 뢰켄이라는 마을에서 천재적이지만 고뇌에 찬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태어났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주장을 두 가지 우화로 이야기했다.
그의 책『이 사람을 보라(Thus Spake Zarathustra,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인간이 종교를 넘어 진화한다면 번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반면 “광인의 우화(The Parable of the Madman)”는 경고였다. 그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을 향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였다.
“밝은 아침에 등불을 켜 들고 시장으로 달려가 끊임없이 외치는 광인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때 마침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보며 크게 비웃었다.
‘그가 길을 잃은 건가?’ 한 사람이 물었다.
‘아이처럼 방향을 잃었나?’ 또 다른 이가 말했다.
‘그가 숨은 건가? 우리를 무서워하나? 여행을 떠났나? 혹은 이민이라도 갔나?’
그들은 이렇게 외치며 웃어댔다.”
19세기 말, 많은 사람들은 신의 무게에서 벗어난 유토피아적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니체는, 계몽주의의 자녀들이라 불릴 그들이 신의 죽음이 얼마나 중대한 사건인지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광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이 어디로 갔냐고? 내가 알려 주겠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 너와 내가. 우리 모두가 그의 살인자들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가? 어떻게 바다를 마실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스펀지를 주어 전체의 지평선을 지워버리게 했는가?
우리가 이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 놓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제 그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든 태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여전히 ‘위’나 ‘아래’가 있는가? 우리는 무한한 허무 속을 헤매고 있지 않은가?
텅 빈 공간의 숨결을 느끼지 않는가? 더 차가워지지 않았는가?
밤이 우리를 향해 계속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침에 등불을 켜야 할 정도가 되지 않았는가?”
니체는 하나님이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졌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서구 문명 전체의 중심 기준점으로서의 하나님을 잃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인식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신의 죽음”은 곧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풀려난 사건”이었다.
이제 삶은 새롭게 상상되어야 했다.
특히, 도덕과 의미에 대해 신의 죽음은 엄청난 함의를 지닌다.
신이 없다면, ‘위’와 ‘아래’, ‘앞’과 ‘뒤’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따뜻하게 할 것이며, 무엇이 우리의 길을 밝힐 것인가?
20세기 내내, 서구 사회가 점점 세속화되고 종교가 주변으로 밀려나면서, 하나님은 삶과 문화의 대부분에서 점점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세속 인본주의자들은 니체의 우화 속 조롱자들처럼, 하나님이나 기독교, 성경의 도덕적 제약 없이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고 약속했다.
의학은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고, 기술은 번영과 편안함, 편리함을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실존주의자들은 비록 삶이 무의미하더라도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적 해방운동은 도덕, 결혼, 자녀라는 종교적 구속에서 벗어나면 무한한 쾌락이 가능하다고 약속했다.
2000년대 초반에 내가 세계관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종종 “무의미한 우주에서 의미를 만들려는 시도의 모순”을 지적하곤 했다.
진리가 상대적이고, 단어에 고정된 의미가 없다면,
“정지 표시(Stop sign)가 ‘가도 된다(go)’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위’가 ‘아래’를 의미해도 되는가?”
“남성이 여성이라고 해도 되는가?”
“살인을 ‘건강관리(healthcare)’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억압(oppression)과 정의(justice)의 정의를 바꾸면, 불의가 정당화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그 예시들 중 일부는 실제로 미국 대법원 판결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니체가 예견한 대로, 가정적 예시는 현실이 되었다.
“광인은 침묵했다.
그리고 청중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들도 침묵한 채 그를 놀라움 속에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등불을 땅에 던졌다. 등불은 산산이 부서져 꺼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아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 오고 있는 중이다.
아직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았다.
번개와 천둥은 시간이 필요하고, 별빛이 도달하기에도 시간이 걸린다.
행위가 이루어졌을지라도, 그것이 보이고 들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 사건은 그들로부터 가장 먼 별보다도 더 멀리 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그것을 행한 자들이다.’”
물론,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다. 니체는 그 점에서 틀렸다. 그러나 그는 의미, 진리, 신뢰,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올 것을 예견했다.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는 드물게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교리문답의 고백과도 같이 그는 “우리의 생명과 죽음에서 유일한 소망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 삶과 죽음 모두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체는 그 소망이 실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또한 한 번 잃어버린 서구 세계가 그 소망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믿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그 점에서도 틀렸음을 기도할 수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