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적 대속은 쓰러진 것일까?
- Sang Lee
- Dec 6, 2025
- 3 min read
형벌적 대속은 쓰러진 것일까?
2025/8/20 - 존 스톤스트리트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i-rMHV3sIKQ
(2) 번역 스크립트 :
이번 달 초, 목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마크 코머는 한 신간이 형벌적 대속(신학적 용어로는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PSA”)에 “결정적 일격”을 가했다고 게시했다. 이에 필자는 성경 전체에서 선포되고 교부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옹호했던 이 역사적 기독교 교리에 대해, 바이올라 대학교의 조직신학 조교수인 새디어스 윌리엄스에게 견해를 물었다. 다음은 윌리엄스 박사의 말이다.
"“Penal”은 ‘형벌’이라는 뜻으로, 기독교 변증가 프랜시스 쉐퍼가 말했듯이 “인간은 우주의 입법자 앞에서 그의 성품에 반하는 일을 행함으로써 죄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 … 그러므로 인간은 진정한 도덕적 죄책을 지닌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죄책은 단지 주관적인 죄책감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 곧 재판장이신 분 앞에서 우리가 가진 객관적 문제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해결이 필요한 문제이다.
물론 재판장이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인정되는 죄인 포스트모던 감수성에는 거슬린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시대의 기분 좋은 말만 하는 소위 "대가"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서 지침을 받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어길 때 나타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500회 이상 언급한다.
PSA의 대속적 부분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인이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라 묘사했을 때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놀라운 교환”이라 부른 이 경이로운 교환은 바울의 말에서도 반향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5:21). 예수님 자신도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가복음 10:45)고 말씀하셨다. 학자들이 “골고다 십자가 아래에 적힌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하는 이사야 53장 5절도 명백히 대속을 말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앤드루 릴레라의 책은 PSA에 대해 세 가지 반대를 제기한다.
첫째, PSA는 너무 법적이라 관계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릴레라는 “보복과 계약이 아니라, 신적 선의와 언약에 뿌리박은 복음”을 옹호한다. 그러나 이 반대는 아름다운 ‘양자 모두’를 거짓된 ‘양자택일’로 만들어 버린다. 결혼을 생각해 보라. 결혼은 법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혼부부가 “결혼 증명서에 잉크가 마르니 이제 관계는 끝이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니다. 법적 선언은 관계를 확증하고 진짜로 만들며 더욱 풍성하게 한다. 입양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법적으로 이루신 것은 우리가 관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그리스도의 소중한 신부”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둘째, 릴레라는 “예수의 죽음은 대속 행위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곧, 사람들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보면서 “휴, 예수께서 내 대신 저 모든 일을 하셨구나!”라고 생각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십자가 사건을 본받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다시 ‘아름다운 양자 모두’가 거짓된 양자택일로 축소된다. PSA의 아름다움은 다른 속죄의 측면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빛나게 하여 더 풍성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헤르만 바빙크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사역은 너무나 다면적이어서 한 단어로 포착되거나 한 공식으로 요약될 수 없다.” ‘다면적’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꼭 맞는 표현이다. 그것은 여러 면을 지닌 보석을 떠올리게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다”(베드로전서 2:21)고 말한 뒤, 이어서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음”에 기뻐한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은 그분께서 “우리 앞서” 죽으셨다는 것에 의미를 더한다. 여기에는 양자택일이 없다. 예수께서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의 본을 따르는 방식이 단순한 감상적 사랑으로 축소되지 않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크리스투스 빅토르’ 관점도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불법을 용서하시고, 우리의 법적으로 지는 책임을 취소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있게 된 데 기초한다(골로새서 2:11-15).
보석 세공업자들은 보석의 평평한 윗부분을 “테이블”이라 부르는데, 이 부분은 다이아몬드의 아랫면 여러 면들이 더욱 빛나도록 창 역할을 한다. PSA는 속죄의 테이블이다. 바로 예수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 앞서 죽으시고, 어둠의 권세를 대항하여 죽으신 사건이 성경적 광채로 빛나는 것이다.
셋째, PSA가 하나님을 제정신이 아닌 학대자로 만들 수 있다는 반대가 있다. 곧,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분노를 퍼부어야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를 범죄자가 아니라 자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강단에서 불행히도 이런 식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다행히도 PSA의 의미는 결코 그렇지 않다. 성금요일 전까지 아버지가 우리를 미워하다가 그날 이후에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속죄는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이 완전한 조화로 함께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이지, 결코 아버지가 아들을 대적한 사건이 아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형벌적 대속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결코 그 이하의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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