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무오성이 중요한 이유
- Sang Lee
- Sep 28
- 2 min read
성경의 무오성이 중요한 이유
2025/7/1 - 존 스톤스트리트 / 글렌 선샤인
1. 영어 오디오 및 원문 스크립트
2. 한국어 오디오 및 번역 스크립트
(1) 한국어 오디오 : https://youtu.be/mHeGWqX7EqE
(2) 번역 스크립트 :
1980년대와 90년대,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는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둘러싼 논쟁이 일었다. 당시 흔히 제기되던 주장 중 하나는, 무오성 교리는 19세기 후반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고등 비평(higher criticism)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오류가 없는 책으로 보지 않았으며, 단지 “무류성(infallibility)”만을 믿었다는 주장이다. 이 두 용어의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즉, 성경은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는 정확하지만, 과학이나 역사와 같은 다른 영역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오성”이라는 단어는 새로울 수 있어도, 그 개념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초대 교부들이 성경을 설명한 방식은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말한 무오성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중세, 종교개혁, 심지어 현대의 신학자들 역시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관점을 견지해 왔다.
40년 전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공격은, 본질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난 성경의 권위에 대한 공격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이성이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격상되고, 과학이 그것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성경 속 기적에 대한 주장들은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창세기를 과학과 일치시키기 위해, 성경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를 전달하지 않으며, 과학적 주장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무오성에 대한 공격은 곧 문자적 해석에 대한 공격으로 확산되었다. “문자주의자들(literalists)”은 종종 하나님이 아닌 성경 자체를 숭배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무오성 교리는 단순히 문자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무오성은 성경 본문이, 원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그 상태로, 올바르게 해석될 경우 자신이 주장하는 모든 바에 대하여 오류가 없다는 교리다. 이 정의의 모든 요소가 중요하며, 특히 ‘해석’이라는 개념이 핵심적이다. 성경이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창세기나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오성을 믿는 이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은 무오하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무오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를 신중하고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무오성 교리는 또한 성경의 저자들이 자신만의 언어와 다양한 문학 장르를 사용했으며, 그들의 개성이 글 속에 반영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베드로가 표현했듯이 성령에 “이끌려” 기록했고 오류로부터 보호받았다. 살아 있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신 것처럼, 기록된 말씀 역시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를 동시에 지닌다. 예수의 인성이 죄를 필연적으로 포함하지 않았듯, 성경의 인간적 요소도 오류를 필연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권위는 여전히 도전받고 있으며, 그 이유는 여전히 동일하다. 성경을 문화 전반에 수용된 가치에 일치시키려는 시도 때문이다. 단지 지금은 그 기준이 과학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로 옮겨졌을 뿐이다. 특히 성(sexuality)과 정체성(identity)에 관한 영역에서 그렇다. 성경이 분명하게 선언하는 동성애, 정절, 결혼, 생명의 가치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이 아닌 성경을 숭배하는 행위”라며 폄하된다. 사람들은 “예수는 모두를 사랑하셨고, ‘급진적 포용(radical inclusivity)’의 복음을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 손에 있는 본문 안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도덕률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을 갖고 계셨으며, 식사 규례를 제외하면 율법의 해석을 바로잡으실 때마다 기준을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하셨다.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길잡이로 삼고자 한다면, 성경 속 예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율법의 도덕적 기준이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동기와 태도에도 적용된다는 뜻이다. 예수는 거룩함, 특히 성적 거룩함에 대해 결코 애매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은 명료하다. 성경 속 예수는 동성 간의 “결혼”을 지지하거나, 낙태를 허용하거나, 아이들을 거세하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행위를 승인하지 않으신다.
성경의 온전한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문화의 변덕이나 인간의 욕망에 권위를 부여하는 일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음서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믿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거부한다면, 당신이 믿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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